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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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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작성일16-07-12 10:59 조회4,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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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영 칼럼] 슬픔의 치유

[2010-05-06 07:01]

 
얼마 전 바다에서 잃어버린 아름다운 46인의 젊은이들을 슬픔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다로부터 들은 가장 큰 아픔, 가장 큰 슬픔, 가장 끔찍한 상실의 이야기를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의 가족들과 주변의 수많은 지인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무엇으로도 위로될 수 없는 슬픔의 고통의 겪고 있을 것입니다. 섣부른 위로가 오히려 더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그분들의 옆에서 함께 울어줄 수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5살의 앳된 나의 막내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그때… 술 취한 동네 아저씨의 오토바이 뒤에 재미로 탔다가 내리막길에서 균형을 잃고 커다란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스러져갔던 그때….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 착하고 순진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아기였을 때부터 업어서 키웠고, 그 아이는 9살 차이 나는 누나를 엄마처럼 따랐습니다.
 
그리고 너무 이른 결혼을 하고 임신 중이었던 내게 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기 가진 사람이 끔찍한 장면을 보는 게 아니라며 모두들 말렸고 나는 사랑하는 막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아니, 떠나보내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 그 아이가 떠오르면 몸을 가누지 못할 슬픔에 빠져 한동안 눈물만 폭포수처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에 태아는 유산이 되었고, 나의 슬픔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지금 살았으면 30대의 중반의 건장한 남성이 되었을 그 애를 그리워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면, 더욱 그 애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잊어버렸던 슬픔을 불러와서 또다시 가슴 먹먹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막내아들을 잃어버린 내 아버지는 그 과묵한 성격에 말도 못하고 눈물도 마음껏 못 흘리고 몇 달 동안이나 정신을 놓아버렸었고, 내 어머니는 막내가 다닌 골목이나 학교 교정이나 그 애의 친구 집이나 그 애가 놀았던 놀이터 등을 미친듯이 헤집고 다니며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을 통곡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래서 압니다. 가족 한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비극과 상실의 아픔과 그를 추억하는 고통과 이별의 슬픔 등이 가족 모두에게 얼마나 크게 휘몰아치는지를.
 
언젠가 딸을 잃은 어머니가 찾아와 깊은 애도의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울지 않는 것이 의연하고 신앙심 깊은 모습이라는 왜곡된 신념 속에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몇 년이 지나도 딸을 떠나보내지 못한 그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과 대면하면서 참으로 슬프고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여러 번의 애도 과정과 슬픔을 슬퍼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회복이 되어갔습니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의 5단계를 거론하면서,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부정하다가 그 다음 그 일이 자신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 분노를 폭발하고, 그 다음에는 그 일에 대해 타협하고 나면, 깊은 우울 속에 갇혀 극도로 의기소침해지다가, 마침내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수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없이 바로 수용하는 사람이 위대하거나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슬픔의 치유는 치유하는 공간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그룹치유도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치유합니다. 아픔이 또 다른 아픔을 치유합니다. 우리는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게 될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위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내 슬픔을 받아주고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신앙 깊은 사람은 슬퍼하면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진다”, “될 수 있으면 잊어버리고 바쁘게 살아라” 등의 통념이 슬픔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슬픈 모습이 약한 모습이라는 인식이 더 깊은 상처로 새겨집니다.
 
슬픔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말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옆에서 슬픔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함께 울어주면 됩니다. 슬픔은 상실에 대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가족과의 마지막 이별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슬픔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영혼의 밑자락에 슬픔의 냄새가 배어들어 사는 내내 슬픔이 묻어나오게 됩니다.
 
나는 이제 내 막내동생을 추억하면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있지만, 그때처럼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가족비밀도 아닙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게 될 날을 소망하며 기다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슬픔이 나약한 것도 아닙니다.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46인의 주검 때문에 우리 모두는 슬픔을 느꼈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함께 슬퍼해주고 기다려 준 것’ 때문에 위로와 힘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가족들과 이땅에서 모든 슬픔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이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셔서 온갖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4[표준새번역]-”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8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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