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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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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작성일16-07-15 11:15 조회3,1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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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영토

          ________시치료의 방
          
                        강은교시인

              1
      서序에 대신하여

시는 비밀의 집중이다. 
시의 방의 커튼은 비밀의 천으로 짜여져 있다.
이 비밀의 커튼 안에서 시는 일종의 영역이 되어 자기의 삶이 놓인 영토를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시의 비밀은 또한 비밀이 아니기를 원하는 이율배반의 비밀이기 쉽다.

그러므로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첫 번 째 계단은 우선 비밀의 방에 충실한 ‘스스로 몸뻗기’의 단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의 방으로 오는 이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마음껏 몸을 뻗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방에서의 시치료는 자기 안의 세상과 자기 밖의 세상을 부정에서 빠져나오게 하며, 인간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두 번째 계단은 ‘자기 들여다 보기’와 ‘주인되기’의 단계이다. 스스로 몸 뻗은 인간은 자기를 들여다 보면서 자아 찾기에 나선다. 그는 또한 ‘지금, 여기’를 인식하면서 자기 정신의 주인이 되며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세 번째 계단은 ‘자기에게 말걸기’의 단계이다. 여기서 그는 말하게 될 것이다. 자기에게 못보던 말을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며, 시읽기, 시듣기, 시쓰기를 통하여 무의식이라는 심연에서 울려오는 자기의 말을 듣게도 될 것이다.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네 번 째 계단은 ‘타인에게 말걸기’의 단계에 그를 서게 한다. 여기의 단계에 이르면 그는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 편지는 인생의 어떤 시간 이후 써본 적이 없는 연애편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애는 타인과 만나는 아주 깊은 길이며 살아 있는 길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다섯 번 째 계단은 ‘관계의 확대의 계단’에 그를 서게 할 것이다. 연인은 일인一人과의 정신적 유대를 지나 수인數人과의 유대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할 것이며 그의 소외를 연결의 선線 위에 서게 할 것이며 시쓰는 이 또는 시의 화자는  시읽는 이에게로 건너와 또 다른 관계의 세계를 이루어 낼 것이다.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다섯 번 째 계단은 여섯 번 째의 계단인 ‘자기 찾기’의 단계에 서게 할 것이다. 

여섯 번 째의 계단은 ‘자기 찾기’의 단계이다. ‘자기 찾기’의 단계는 예컨대 모든 심리 치료가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지점 같은 곳이다. 여기서 피시치료자는 자아를 찾아 광장이라는 세상의 뜰로 나옴으로써 보다 성숙한 사회 속의 인간이 되어 정신의 치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이 시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를 시치료자와 피시치료자로 구분하여, 또 개인시치료와 집단시치료의 경우를 병행하며 살펴보기로 한다. 개인시치료라 함은 시치료자가 피시치료자를 일 대 일로 상대하며 시치료를 행하는 경우이며, 집단시치료는 소모임 등에서 시치료자가 다중多衆을 상대로 시치료를 행하는 경우이다.


                2
        첫 번 째 : ‘몰두’와 ‘스스로 몸뻗기’ 
       
우리의 스트레스 중 많은 것들은 몰두하지 못하는데서 오기 쉽다. 바깥 세상의 소음이 우리의 고요하려는 내면에 끊임없는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리벽___비행기가 급강하 할 때 공기의 파동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공기벽으로 비행기를 진동하게 하고 파괴하기 까지 한다__처럼 존재를 진동하게 하고 부숴 버린다. 존재는 허약하게 될 수 밖에 없으며, 세상의 거부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또한 파편화 할 수 밖에 없다. 몰두함은 이러한 거부를 완전히 자기의 제어 아래 두게 할 것이다. 
몰두의 순간 우리는 그 부정적 상황 등을 잊어버림이 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잊어버림의 습관화는 그것의 침투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한 몰두는 신체적인 몰두로부터 쉽게 올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은 항상 몸과 함께 있기 마련이므로 신체적인 몰두를 행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한 접근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테면 잘 안펴지는 척추를 곧게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것을 곧게 하려는 욕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의료적 치료처럼 시치료도 마찬가지이다. 피시치료자의 시치료에 대한 긍정적 상태는 시치료를 용이하게 할 것이며 많은 성과를 얻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시치료는 궁극에는 인간세상을 펴는 일이 될 것이며, 그 인간세상 안에 있는 자기를 긍정으로 쓰다듬는 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첫 번째 계단에서의 시치료 행위의 키워드는 ‘몰두’, ‘스스로 몸뻗기’, ‘자기몸의 주인되기’이다. 현대인은 문명생활에서 길들여지느라고 본래의 육체적 능력들을 많은 부분 상실하고 있으며, 아울러 과다한 치료의 가능함과 약품 등의 창안과 발견, 인공적인 운동들은 현대인들을 갈수록 약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치료자는 시치료자의 몸을 강하게 하여 위에서 언급한 몰두를 신체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몸과 정신은 분리 불가능할 뿐 아니라 스트레스가 강해지고 그 빈도가 증가할 수록 그 분리의 간격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필자가 제안하는 것은 ‘요가’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스스로 몸을 뻗게 하므로 그 동작을 쫒아가다 보면 마음이 한껏 펴지는 상태와 몸을 뻗는 상태가 등가를 이루게 되어 ‘몰두’가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상 같은 것이 플러스 된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시치료가 이루어지는 상태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이는 필자의 제안일 뿐이다. 
  만약 ‘스스로 몸뻗기’가 불가능한 경우이거나, 협소하거나 정적인 방에서 시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거나 또는 피시치료자의 상태 때문에 요가 따위의 운동이 불가능할 경우, 특히 개인시치료에 있어서 시치료자는 명상의 방법을 자기식으로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아무튼 시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시치료를 받아 들일 수 있는 몸과 정신의 상태를 이루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단계는 개인시치료와 집단 시치료의 경우 각기 적절한 방법을 이용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3
          두 번 째 : ‘자기들여다보기’와 ‘주인되기’

‘몰두’와 ‘스스로 몸뻗기’의 계단을 지나면 ‘자기 들여다 보기’, ‘주인되기’가 용이하게 될 것이다. ‘자기 들여다 보기’란 ‘지금 여기’의 인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있는 자리, 자기가 살고 있는 순간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 자기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자기를 ‘들여다 보기’와 자기의 ‘주인되기’ 가 가능해질 것이다. 
자기의 주인이 된다 함은 정신과 몸의 두 부분에서 동시에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선 위에 언급한 신체적인 몸뻗기의 행위와 함께 자기의 존재를 이루는 여러 가지 사항을 엄밀히 점검하게 되는 것이다. 
피시치료자로 하여금 추억들(유년시절은 물론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상황과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을 회상하게 하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첫 번 째와 두 번째의 항목은 엄밀히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구분을 하는 것은 마치 달걀과 닭을 구분하려 하는 것처럼 불필요한 소모가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과 지금 여기 자기가 있는 곳을 인식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부터 실은 모든 치유는 시작된다.
시치료가 시작되는 실제적인 지점은 여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위해서 시치료자는 피 시치료자에게 ‘지금 여기’의 인식, 즉 피시치료자가 있는 자기 위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시치료자는 피시치료자로 하여금 추억들의 회상과 함께 자기의 가계家系를 이야기 하게 한다든가 자기 동네, 또는 자기가 매일 지나는 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게 한다든가하는 심리치료의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방법은 특히 개인 시치료의 경우 효과적이지만, 집단 시치료의 경우에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시치료의 경우에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면  소모임 등에서 위의 사항 등을 써서 제출하게 하는 것이다. 

              4
       세 번 째 : ‘자기에게 말 걸기’*


‘자기 들여다 보기’가 가능해 졌다면 ‘자기에게 말 걸기’가 그 다음 단계에서는 당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기이해가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단계는 또한 자기를 객관화 시킴으로써 자기를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에게 말 걸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 우선 시치료자가 피시치료자에게 ‘시일기’라든가 ‘자기에게 시편지’ 쓰기 등 ‘시쓰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의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시로 인한 치료효과는 ‘시쓰기’가 ‘시읽기’ 라든가 ‘시듣기’ 보다 용이하게 첫 번째 계단에서 지적한 ‘몰두’를 실천하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자기(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은 이 ‘시쓰기’를 통해 더욱 잘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피시치료자는 이제까지는 잘 몰랐던 자기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마음이 고요해진다든가 하는 정신의 개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치료자는 ‘시편지쓰기’를 ‘고백시쓰기’로도 유도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처음부터 ‘고백시쓰기’를 시도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고백시쓰기’의 다음 단계에서 ‘자기에게 시편지를 던지는 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객관화이기 때문이다. 시치료에 있어서 시는 바로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때 주의 할 것은 잘 쓴 시를 시치료자는 절대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시형태는 ‘시일기’와 같은 고백체의 시이면 된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시를 시치료자는 피시치료자에게 강조하며 주입시킬 필요가 있다. 시의 전문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며, 좋은 시를 강조하지도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로 하여금 자기 시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개인시치료에 적합하며, 또한 가능한 방법이나 집단 시치료의 경우에도 ‘고백시쓰기’ 시간을 준다든가, 하는 것은 시치료가 아주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할 것이다.

                      5
          네 번 째 : ‘타인에게 말 걸기’ 

위의 ‘자기에게 말 걸기’의 단계는 ‘시편지 쓰기’를 통하여 자연히 ‘타인에게 말 걸기’의 단계로 이행하도록 시치료자는 피시치료자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피시치료자의 고독이라든가 소외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현대인들의 내면적 스트레스들의 많은 부분은 도시라는 서로 분리된 공간____농촌이라 할 지라도 현대에는 거의 비슷한 삶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___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서 오는 ‘분리의 의식’이다. 분리의 의식은 일차적으로 나와 남에 대한 분리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현대인의 주거형태는 원시공동체사회와는 달리 개인을 서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늘 무수한 ‘분리’를 경험한다. 이 ‘분리’의 근원은 해체와 단절이다. 정부와 개인의 분리, 역사와 개인의 분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분리, 가족의 분리,.........등 많은 분리와 해체, 단절은 아마도 현대인들의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라고 할 수 있는 소외를 이루는 것이다.  
시치료자는 ‘연시쓰기’를 통하여 이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 ‘연시쓰기’는 아마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시 쓰기’는 가장 은밀한 자기 고백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며 이를 통하여 타인에게 말 걸기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우에 은유와 직유 등의 시적 테크닠을 사용하게 함으로서 ‘타인에게 말걸기’의 상태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시치료자는 또한 ‘시편지 쓰기’___이의 대상은 특정 대상이어도 좋고, 불특정대상이어도 좋다___를 통하여 피시치료자의 객관화가 공동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연시 쓰기’, ‘시편지 쓰기’의 방법은 특히 개인 시치료시에 좋은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 시치료시에도 ‘제출의 방식’등 시치료자의 창안적 테크닠으로 보다 높은 성과를 이룩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다섯 번 째 : ‘교환성’과 ‘관계성’

‘타인에게 말 걸기’가 이루어 졌다면 ‘관계성’의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관계성’ 속에서 분리는 해소되며 소외는 친화로 바뀌게 된다. 타인과의 균형적 유대가 이루어지며 단절로 인한 해체의 불안이라든가 고독에의 침잠은 ‘관계성’ 속에서 소멸하게 된다. 핵가족이 대부분인 현대인들의 현실과는 달리 정신적 대가족이 이루어지게 된다. 타인을 의지하는 일이 결코 부끄럽지 않게 된다. 부정적 정서들은 사라지고 긍정적 정서가 그 자리를 채우면서 정서의 ‘교환성’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교환성’이 일어나는 순간 현대인들의 고독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인 ‘소통의 불가능’이라는 문제는 ‘소통의 가능’으로 변함으로써 타인과 내가 연결되게 된다. 이 ‘연결’ 위에서 서로의 관심사가 서로를 바라보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마당이 열리게 된다. 
일인의 공간은 보다 넓어져서 타인의 공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열린 정신들이 된다. 일인과 수만인이 연결되게 된다. 
여기서 시치료자는 ‘시 읽기’와 ‘시 듣기’를 제시함으로써 ‘교환성’과 ‘관계성’의 확대를 꾀할 수 있다. ‘시 읽기’와 ‘시 듣기’ ‘시 쓰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 분명하게 말 할 수는 없으나, ‘시 읽기’와 낭송자에 의한 ‘시 듣기’, 그리고 ‘시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시의 치유적 성격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피 시치료자는 이 세가지 역할을 동시에 함으로써 공동체의 연결성과 교환성, 관계성을 더욱 잘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영상과 시를 결합한다든가, 음악과 시를 결합하는, 또는 연극과 시를 결합하는 ‘시퍼포먼스’들에 의해서 더욱 잘 실천될 수 있다. 이 ‘시퍼포먼스’의 방법은  소모임 등의 집단 시치료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모임은 주로 시낭독회 라든가 시연극회, 시음악회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집단은 집단이라고 해서 아주 많은 수의 청중은 오히려 시의 전달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필자는 대규모 공연으로는 시치료가 잘 이루어질 수 없음을 경험하였다. 시치료자와 피시치료자들 간의 공감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정도의 공간에서 소모임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특히 ‘시 듣기’에 의해서 시인과 독자인 피시치료자는 동일시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으며 소기의 성과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시치료자가 소규모의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필요로 한다.

                       7
                여섯 번 째 : ‘자기찾기’

이러한 노력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 성취 되는 순간 시치료는 ‘자기찾기’의 확대를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자기찾기’의 확대는  일인의 방에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수만인을 끌어 안을 수 있다. 즉 포용의 단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찾기가 이루어지는 그 방은 지극히 내밀한 방이 될 것이며 동시에 세상찾기의 방이 되는 것이다.
그는 ‘고백시 쓰기’를 통하여 ‘자기’의 극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타인의 삶과 세상을 긍적적으로 보는 에너지를 더욱 많이 얻게 되어 세상을 보다 여유롭게 부드럽게 지나가게 될 것이다. 
많은 스트레스들이 그 여유와 부드러움 속에서 해소될 것이다.
그의 정신은 맑고 부드러운 물방울처럼 세상에 스며들 것이다. 그는 몸과 정신 모두 ‘건강한’ 인간이 될 것이며, 그가 사는 사회도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8
                          결론 삼아서

필자는 이 글에서 실제적인 시치료의 방법들의 제시를 통해 우회적으로 시치료의 정신에 도달하려 하였다.

그러한 실제의 방법들에서 도출된 시치료의 정신은 바로 인간 존재의 구원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극도로 피폐해가는 인간의 정신의 회복은 아마 시찾기를 통한 행위들 즉 ‘시 쓰기’와 ‘시 읽기’, ‘시 듣기’를 통한 방법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시치료의 정신은 이와 같이 시의 치유적 성격을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의 치유적 기능을 말한 이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는 반대로 시는 시의 내부에만 갇혀오게 되었다. 그것이 낭만주의 말기의 퇴폐적 경향들을 거치면서 보다 단절이 극대화되는 암호의 시대 속에 시를 위치시키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의 불소통과  현대시의 소통퇸지 않음은 함께 이루어 지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갈수록 예술은 필요해지고 있다. 아마 인류의 역사시대의 어느 순간보다 예술의 유용성은 필연적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언어라는 사회적 기호를 도구로 쓰는 시라는 예술쟝르는 더욱 중요해진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야말로 인간의 정신에 가장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시는 소통이 힘들어지고 있는 현대에서 보다 새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이 점은 점점 축소되고 있는 시의 영토에 출구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현대인의 ‘소통되지 않음’이라는 병은 시로써 보다 완화될 것이며 그로 인한 소외와 고독이라는 병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고 이러한 스트레스들의 해소는 육체적인 치유까지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실제로 교통사고를 치유했다는 보고도 있고 보면 시치료는 정신에만 관계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소통’가능‘이라는 시치료의 궁극적 결과와 그 소망은 ’소통 불가능한‘ 현대시의 미래적 대안도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현대의 정신적인 문제들___ 소외, 결핍, 장애에서 오는 것들, 불안, 근심, 부정적 사고, 존재의 왜소화, 고독___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 그러나 시치료의 방은 수인의 뜰을 거쳐 수만인의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수인의 뜰과 수만인의 광장에 선 시치료의 정신은 우리 모두의 몸과 정신은 물론 위기에 있는 현대시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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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중 ‘자기에게 말걸기’‘타인에게 말걸기’의 용어에 관해서는 ‘대한의협 창립 100주년 발표대회’ 중 ‘의사문학제’에서 발표한 이병훈(가톨릭 의대)교수의 발표요지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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