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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 노릇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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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작성일16-07-15 11:32 조회3,2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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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 노릇 한다는 것

  


  


                                                                                          김 재 환

                                                           (한양대 의대 신경정신과 임상심리학 교수)

 


부모-자녀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건전한 부모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자기의 능력과 재능을 충분하게 발휘함으로써 이 사회에 기여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일 것 같고 ‘자녀들이 그렇게 자라도록 노력한 좋은 부모였으면’ 하는 것일 것이다. 이 말에 동의를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부모가 될 수 있는가? 일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30 여 년간 심리학, 특히 그 대부분을 임상심리학을 공부해 오면서 대학병원 정신과와 대학의 학생상담실 등에서 성인은 물론 아동, 청소년환자(내담자)들을 평가하고 도와준 경험과 이제는 성인이 된 두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 글의 목적은 원만한 부모-자녀관계에 대해 어떤 모범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중심이 있고 소신 있는 부모상을 지향하는 부모들이 부모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1. 좋은 부모가 되려면 부모도 계속 성장하고 변화해야 한다.


부모-자녀관계의 변화를 전(全) 생애적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부모를 정점으로 하는 초기의 수직관계에서 점차 수평관계(역 시계 방향)로 이동해 가며 책임 있는 성인이 된 후에는 자녀를 정점으로 하는 역 수직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부모를 정점으로 하는 초기의 ‘수직관계’ 단계에서 부모들은 아이가 배고파하지 않나? 몸에 아픈 데는 없나? 발달이 늦되지는 않나?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가? 따돌림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는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다 사고를 당하지는 않나? 심지어 귀가가 늦어지면 혹시 유괴라도 당하지 않았나?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가 뒤쳐지지는 않나? 질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지는 않나? 대학 특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 등등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걱정을 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이 지나쳐서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거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러한 관심과 도움은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 반면,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 시기에 부모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과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적절하게 충족되지 못한 관심과 사랑의 결핍상태는 자칫 심리적 위축감, 대인관계 회피와 소외감, 자존감과 자신감의 저하, 불안, 우울 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인 초기의 수직관계는 점차 ‘수평관계’로 이동 또는 변화해 간다. 부모-자녀관계가 수평관계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자라고 생각이 어른스럽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며 든든한 의논 상대자로 변화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고 부모의 건강을 염려하며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고 집안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부모의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녀를 보면서 ‘늘 어리게만 보았던 우리 아이가 어느새 저렇게 자랐나!’ 하고 대견해 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는 이러한 대견함을 자녀들에게 표현하고 그들의 의견, 아니 그들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아무개가 이제 다 컸구나!’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을 일이야, 수고했다(고맙다).’ ‘너한테 털어놓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다.’ ‘네가 이해하고 동의해 주어서 다행이다(고맙다).’ ‘우리(부모)의 생각은 이런데 네 의견은 어떠냐?’ ‘네 생각이 신중하고 일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부모)의 생각은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 등등의 대화 속에서 자녀들은 자신이 권위적 인물의 일차적 대상인 부모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자녀들은 훗날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당당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게 될 것이다.

부모-자녀관계의 마지막 단계인 ‘역 수직관계’는 자녀들이 더 성장해서 학업을 마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부모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부모의 노고에 감사하고 부모가 나이 들어감을 슬퍼하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도록 돌보아 주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성공적으로 도달한 지각 있는 자녀들이라면 부모가 어떤 상황과 조건하에서 무엇을 할 때 편안하고 행복해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사업자금에 쓰게 아버지 퇴직금을 주세요.’ ‘제가 받을 상속분을 미리 주세요.’ ‘저희들은 휴가를 다녀 올 테니 두 분은 집에서 편히 쉬시면서 손자들이나 봐 주세요.’ ‘시골에서 고생하지 말고 서울에 있는 저희들 아파트로 오셔서 편히 쉬세요.’ 등의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자녀관계가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부모의 할 일이란 자녀들이 건전하게 위의 세 단계들에 차례로 도달하도록 모범을 보이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수직-수평-역 수직관계로의 이동 또는 변화의 의미를 이해함과 동시에 부모 자신도 방향은 다르지만 동일한 단계나 과정으로 변화해 가고 있고 또 변화해 가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부모는 자신과 자녀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좀 더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모도 계속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부모들이 속해 있는 발달시기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다. 청소년(대략 12-22세) 자녀들의 부모의 나이는 대체로 30대 후반에서 4,50대가 될 것이다. 심리학자 에릭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기는 인생의 여러 측면에서 안정되고 성숙된 시기로 자신과 자기세대의 이익과 번영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들의 세대 및 역사적 미래를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하는, 생산적인 활동의 시기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자녀들의 세대를 위해 자연보호운동이나 근검절약, 문화적 유물의 보존 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한 극단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편안, 자기 당대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자아탐닉’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녀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녀의 교육이나 복지 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아탐닉에 빠져 사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훗날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한편, 오늘 우리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자녀교육에 몰두해서 자칫 자기 자신의 발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 또한 건전한 부모-자녀관계를 해치고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중년기(대략40-65세)의 어느 시기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나 자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등 자기정체감의 극심한 동요를 경험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 명문대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40대의 교사가 20여 년간 모교의 우상으로 떠받들리다가 어느 날 문득 ‘진정한 나의 삶은 무엇이었나?’ 라는 질문에 부딪치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자신의 아이를 교살한 일로 정신과에 입원한 예가 있었다.

부모-자녀관계에서 부모도 계속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한 노력 중 다른 하나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해 가는 만큼 부모도 수직관계의 정점에서 수평관계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녀와 수평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거나 자녀와 동등해 진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10세 이전의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전능한 존재로 보나 15세가 되면 무식한 존재로 보다가 20세가 되면 우리 부모도 아는 게 있고 모르는 게 있는 존재로 볼만큼 신체적, 지적 발달과 변화가 빠른 청소년 자녀들의 힘과 정신적 성숙을 인정하고 믿어주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담실을 찾는 많은 청소년들이 권위인물의 원형인 아버지를 권위적이고 독단적이고 고집스럽고 대화가 안 통하는 존재로 표현한다. 자녀들은 성장하는데 부모들은 여전히 수직관계의 정점에 머물러서 자녀들을 판단력이 부족한 영원한 어린아이로 보는 때문이다.

자녀가 더 성장해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할 즈음이 되면 부모의 위치는 수평관계에서 역 수직관계로 다시 이동을 해야 한다. 다시 한번 부모역할의 수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때쯤이면 전면에서 물러서고 수동성과 단순화, 자족의 미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손자들이 하나 둘 생기게 되면 조부모는 그간 누려왔던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으로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 아이들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맞벌이를 하는 가정에서 아이의 교육문제로 부모-조부모간에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조부모가 의식적이든 아니든 여전히 주연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역 수직관계로의 이동을 수용해야 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모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여러 가지 변화가 필연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있는 부모들이 맞게 되는 변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신체적 변화

소위 성인병이라는 고혈압, 당뇨와 같은 고질적인 질병의 발생뿐만 아니라 자극에 대한 반응시간의 둔화, 힘(에너지)이나 활력의 감소 등이 나타나는데 이 때 ‘마음은 아직 20대인데 몸이 따라오지 못한다(전만 같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운동, 긴장완화를 위한 휴식, 과다한 영양섭취, 건강에 대한 관심의 소홀로 인한 비만이 신체를 약화시키기도 하고 알콜이나 약물의존, 심한 스트레스 등이 신체적 건강을 더욱 해치기도 한다. 40-50대의 여성에서는 폐경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때는 에스트로젠의 부족과 홀몬의 불균형이 뚜렷해져 자율신경계가 영향을 받게 되고 혈관운동신경이 불안정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변화들은 여러 가지 심리적, 정서적 반응, 예컨대, 두려움, 불안, 비탄, 우울, 분노 등을 일으킨다.


2). 경제적 측면에서의 변화

중년기는 수입이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지만 부모나 자녀를 돌보아야 하거나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상외의 경제적, 환경적 부담을 갖게 된다. 혹 이른 정년퇴직으로 인해 취업과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만일 이 시기에 실직을 하면 오래가고 취업을 하더라도 낮은 급료를 받기가 쉽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주기를 미리 계산해서 대처해야 한다.


3). 사회적 역할의 변화

중년기의 사회적 역할은 책임감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적고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 즉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로서의 역할이 정해져 있고, 지역사회에서는 직장, 친구들, 교회, 국가에 대한 역할이 한정되어 있어서 직업, 교육, 주거위치와 스타일, 여행 등에서 덜 자유스러워진다. 이러한 역할들을 계속 잘 수행해 나갈 때 여전히 영향력과 힘을 갖게도 되지만 목표추구 과정에서 곤경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4). 심리적 측면에서의 변화

중년기에는 결혼여부, 가족상태, 성, 경제적 수준 등에 관계없이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관련된 개인 내적 경험(주제)들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개인에 따라 대처방식이 다르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거나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차이는 있어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중년기에 이르렀거나 곧 중년기를 맞게 되는 부모들은 자신과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중년기를 힘이 절정에 달하고 개인적 성취, 사회적 우호관계, 시민자격, 신체적 원숙함이 나타나는 ‘인생의 절정기’로 보는가? 아니면 자녀들이 성장하여 부모 곁을 떠난 ‘텅 빈 새둥우리’ 시기로 보는가?

둘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산목록을 조사하여 꿈이나 환상을 버리고 남은 생애를 현실적으로 평가하거나 때로는 일찍 방향 전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산목록을 조사할 것인가? 아니면 폐쇄적인 운명론에 빠져 있을 것인가?

셋째, 자식으로서의 성숙을 이루어 부모가 나이가 들고 전능감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며, 부모와의 개인적 갈등을 해결하고 부모의 죽음에 대해 건강한 슬픔을 경험하는, 자기위선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위선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을 것인가?

넷째, 인생을 절반쯤 살았다고 생각될 때 나머지 절반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나이를 거꾸로 센다는 것의 의미를 앎으로서 건설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을 것인가? 아니면 청년이나 자손들을 선망하면서 회춘(?)이나 정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광하듯 찾아다닐 것인가?

다섯째, 자아신념이나 깊은 현실적 확신을 갖는 가치체계를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과격함과 극단론에 빠져 있을 것인가?

여섯째, 지금까지 광범위한 관계를 발전시켜온 일과 관계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나 관계를 중단하고 보다 중심적이고 특히 긴요한 일과 관계에 한정시키는 단순화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완고함과 계속적인 확산을 추구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주제들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의사소통의 간소화를 추구하고 어디쯤에서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만두고 어떤 사람과 어떤 종류의 연속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것인가? 아니면 반복성과 권태, 조급함을 가질 것인가?

공자는 40대를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여 어떤 부귀나 권세에 미혹됨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다. 이 나이쯤에서 일과 사랑, 과부족이 없는 삶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부모자신이 성숙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로부터도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 있을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갖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부모들 자신의 계속적인 성장 및 변화와 함께 인간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감을 갖는다는 것은 부모들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이 자신에 대한 신뢰감과 긍정적인 사고, 정서적 안정감, 나아가서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일과 관계에서 자발적인 동기(목표 지향적인 행동)와 적극성을 발휘하는데 기초가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뢰감과 믿음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행동을 관찰하는데서 또는 부모와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되며 점차 또래관계나 동료 및 친구관계, 사회생활에서의 전반적인 대인관계 등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일반화)되어 간다.

자녀들의 신뢰감 형성을 위해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자녀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자녀들의 행동을 일일이 추궁하지 않고 믿어 주는 것이다. 필자의 둘째 아이가 네 다섯 살쯤 되었을 때 퇴근 무렵이 가까우면 가끔 집에 올 때 과자를 사 오라는 주문을 하곤 했다. 필자는 그 약속을 지키곤 했는데 가끔은 회합이 있어 늦게 들어가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자다가 일어난 아이는 이미 그 일을 잊고 있었지만 필자는 일이 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날 꼭 지키겠노라고 약속하고 이행하곤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그 때 필자의 집은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앵봉산 중턱에 있었는데 경사진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탄다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골목길엔 차도 많이 다니는데 경사진 데서 자전거 타는 게 아버지는 걱정이 많이 되니까 아무개가 좀 커서 4학년이 되면 사주겠다고 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달력에 ×표를 해 가면서 1년을 기다려 주었다. 물론 아이는 1년 후 자전거를 갖게 되었고 며칠 후 잃어 버렸지만. 어릴 때 형성된 부모-약속을 지키고 자녀를 믿어주는-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그 후 한 때 컴퓨터 오락실에 빠져들긴 했지만 비교적 탈 없이 성장해서 지금은 대학원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자녀들의 기본적인 신뢰감 형성을 위해 부모들이 유의해야할 다른 하나는 부모가 서로 신뢰감을 갖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복해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은 아버지와 같은 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한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면 부모처럼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만일 부모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거나 도박이나 알콜에 의존해서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경우, 관심과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잔소리와 간섭을 하는 경우, 과 보호적 이거나 무관심한 경우, 또는 끊임없이 다투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녀들은 결혼이나 이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나 적대적 또는 혐오의 감정을 갖게 되고 위축되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적응적인 성격특성을 갖게 될 것이다.

  


3.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정서는 비합리적이고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으나 강력한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일으키는 주관적인 심리적 과정으로, 개인의 정신생활에 있어서 양념이나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음식에는 양념이 적당히 들어가야 제 맛이 나고 기계나 자동차는 윤활유가 적당히 들어가야 제 기능을 발휘하듯이 개인의 정신생활에 있어서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 내적 사고활동이 원활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란 마치 안개가 자욱히 끼면 김포공항의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녀들, 특히 청소년 자녀들에게 있어 정서적 안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청소년기란 그 자체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기의 개념, 즉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수많은 역할들, 예컨대, 집에서는 맏아들(딸)이고 형(동생)과 언니이며 학교에서는 학생이고 선배(후배)이고 동아리의 회장 등의 역할이 그 개인에게 통합됨으로써 자기의 주체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들의 통합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되지 못할 때 ’역할혼란‘이 일어나 방황하게 되고 일탈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2,30대 젊은이들의 이혼율이 증가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결혼 후에 오는 여러 역할들이 기존의 자기 역할에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30대 후반의 어느 여자환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어머니의 역할과 함께 선생의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초등학교의 전 과목을 공부하느라 지쳐 있었다. 심리치료가 진행되면서 어머니의 역할만 잘하기로 하면서 신경증적인 갈등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자녀들이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부모들이 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자녀들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늘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적절한 심리적 거리란 부모가 항상 가까이 있지만 밀착되어 있지는 않은, 편안함을 느끼는 간격과 거리를 말한다. 이 적절한 심리적 거리는 비유컨대 겸손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게 맞아주기 때문에 쉽게 다가서지만 선 듯 끌어안을 수는 없을 것 같은 ‘스님들의 합장한 모습’과 같은 것이다.

자녀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부모들이 유의해야 할 다른 하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때론 자녀들이 부당한 요구나 행동을 할 때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하며, 이와 함께 ‘보상의 체계’를 일관성 있고 분명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부모들이 항상 부드럽거나 엄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후자는 동일한 행동에 대해 다른 관심과 칭찬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녀들이 칭찬 받을만한 또는 꾸지람을 들을 행동을 했다고 할 때 부모의 기분에 따라 동일한 행동에 대해 오늘은 칭찬을 하고 다음날에는 꾸지람을 하는 식으로 일관성 없게 반응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부모의 할 일은 자녀들이 기본적인 신뢰감과 정서적 안정감 및 다음에 언급할 자발적인 동기를 가짐으로써 건전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주고 지원 해 주는 것이다.


4. 자발적인 동기를 갖도록 키워야 한다.


개인의 심리적 과정에는 인지, 정서와 함께 에너지 촉발, 방향성, 조직화, 지속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동기과정이 있다.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배고픔, 목마름, 성욕과 같은 생리적 동기(욕구)와 자극동기, 성취동기, 극복동기, 작업동기와 같은 심리적 동기가 있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극복동기이다. 극복동기(내적 동기)란 활동(일) 자체에서 생긴 동기로, 다시 말하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정상경험(peak experience)을 얻으려는 동기이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서려는 유아, 공부 자체가 재미있어 계속하다 보니 일등도 하고 인정도 받게 된 학생,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또는 산이 좋아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 검도를 하다 보니까 계속하게 된 여학생, 글쓰기가 좋아 계속하다 수필가로 인정받게 된 의사, 소리가 좋아 창을 하다가 촉망 받게 된 어린이의 활동 등에서 극복동기의 무수히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극복동기는 개인의 생활을 풍부하게 할뿐만 아니라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극복동기는 미리 목표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성취동기(외적 동기)보다 훨씬 기본적이고 중요한 동기인 것이다. 예컨대, 부모의 인정을 받거나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보다는 공부자체가 재미있어 하다보니까 장학금도 받고 부모의 인정을 받게 된 학생이 더욱 성공적이고 행복하리라는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는 미국 동부에 있는 명문대학으로 유학 간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생들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필자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적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동기-이것이 중요하다-에 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적응하기 어려워 본인 스스로, 또는 부모의 뜻에 따라 유학(?)을 간 학생들은 성공할 확률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건강해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자발적인 또는 내적 동기인 극복동기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의 동기적인 측면에 대해 부모들이 유의해야할 것은 자녀들의 자발적인 동기가 발휘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잘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합리적인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무리 좋고 높은 목표라 할지라도 그것이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이거나 자녀 자신의 능력이나 소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일 때, 더구나 그것이 자녀의 극복동기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면 단순히 실패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적응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몇 개월 동안 아이가 좋아하고 비교적 잘하는 수학만을 집중적으로 과외를 시켜 주었다. 가르치는 선생과도 뜻이 맞고 매우 재미있어 했는데, 학교에서 치른 모의고사 성적이 뛰어나 담임, 수학교사, 교감, 교장이 관심을 갖게 되자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싫어하던 암기과목의 성적까지도 올라 원하던 대학, 원하던 과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는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도 -물론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다양한 재능과 창의성을 지닌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이 말은 머리가 좋고 일류대학을 나와야 성공한다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 창의성이 있는 이른바 괴짜(?)들이 많을 때 사회는 유연하게 발전하고 개인이나 사회도 행복해 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적 또는 자발적인 극복동기가 극대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녀의 동기적인 측면과 관련해 부모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부모가 자녀대신 해 주거나 미리 알아서 해주는 대신 자녀가 스스로 심사숙고해서 요청할 때 도와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도 필자는 성인이 된 두 아이에게 가끔 이렇게 말을 걸곤 한다. “직장생활(학교 생활)은 어떻냐? 어려운 일은 없고? 혹 아버지가 도와줄 일은 없니?” 그러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은 없구요. 도움이 필요할 땐 말씀드릴께요.”

  


이제 이 글을 맺음에 있어 필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좋은 부모 노릇 한다는 것은, 자녀들이 커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부모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모-자녀관계에 있어 자신은 인생의 주기에서 어디쯤 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 때인가? 자녀들이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다시 역 수직관계로 이동, 성장, 변화해 갈 때 부모도 역 방향으로 이동해 가야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부단히 변화해 가야하며, 자녀들이 건전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 정서적 안정감, 자발적인 동기를 갖도록 도와줌으로서 조화롭고 원만한 부모-자녀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성장하고 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자녀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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